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나는 승리자다 - 제국을 뒤흔든 사나이'라는 부제로 박열 열사와 관동대지진 학살을 조명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치는 군중 속 경성 고등 보통학교 2학년 박준식은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이 만세 운동을 지켜보던 일본인 소녀 가네코 후미코는 총칼 앞에 물러서지 않는 조선인들을 보며 감동했다.
또한 같은 시각 도쿄에서는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가 조선인들을 위해 그들을 변호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사는 곳도 달랐던 세 사람은 이후 운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만난다.
4년 후 도쿄 변두리의 허름한 집에서는 동거 중인 한 남녀가 있었다. 이들은 바로 4년 전 만세 운동을 하던 박준식과 만세 운동으로 큰 감명을 받았던 후미코였다.
이들은 연인이자 동지. 이에 이들은 서로의 신념에 따른 동거 서약서까지 써두고 동거를 하고 있었다. 사실 후미코는 박준식이 쓴 개새끼라는 시 때문에 그에게 한눈에 반했다. 박준식이 쓴 시는 권력 지위 상관없이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마음으로 일본의 어떠한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시였다. 그리고 박준식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박열 열사였던 것.
박열은 그가 자신의 성격에 맞게 스스로 바꾼 이름이었다. 그는 3.1 만세 운동 이후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독립을 위해 직전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시를 교정하게 된 후미코와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 것.
후미코는 박문자라는 조선 이름을 만들고 박열과 함께 항일투쟁에 뛰어들어 폭탄테러를 계획했다.
박열은 의열단을 통해 일본으로 폭탄 반입을 계획했으나 이 계획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열은 포기하지 않았고, 독립 단체를 직접 만들어 친일파들을 직접 응징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후미코는 든든한 동지였다.
그런 그들에게 1923년 9월 1일, 인생을 뒤집어 놓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관동대지진으로 길거리에는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사람들의 손에는 몽둥이, 칼, 죽창이 들려있었고 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외국인들은 발음하기 힘든 일본어를 따라 하게 시켰다. 그리고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로 사살했다.
이는 바로 조선인을 구별하기 위함이었고, 살해의 이유는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였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살아있는 채로 한꺼번에 여럿을 묶어 수장시키고, 기름을 불어 불에 태워 죽이는 등 끔찍한 방법들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를 그들은 조선인 사냥이라 일컬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죽인 이유는 대지진 후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우물에 독을 탔다 등 유언비어가 일파만파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자경단, 경찰, 일본 정부 모두가 손을 잡고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록된 희생자만 무려 6661명.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 이유는 대지진으로 민심이 폭발해 언제든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든 것이었다. 이에 일본 정부가 나서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거짓을 사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폭동 혐의를 뒤집어 씌울 대상은 바로 눈엣가시였던 독립운동가였던 것.
이에 대지진 발생 이틀째 박열과 후미코가 체포됐다. 이들은 대지진의 혼란 속 동궁 암살 거사를 계획하다가 발각됐다는 대역죄로 체포된 것. 물증도 없는 이 사건에 박열은 "황태자 한 마리를 해치우려고 했다"라며 자신의 역모를 인정했다. 그는 이 사건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일본이 얼마나 나쁘고 항일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재판정을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 알리겠다는 게 그의 의도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우리 변호사라 불리던 후세 다츠지가 박열과 후미코의 변호인으로 나섰다. 그리고 박열은 재판을 앞두고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첫째 조건은 재판에 조선의 예복을 입겠다는 것. 그리고 둘째 조건으로 박열은 "나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법정에 서는 것이므로 나의 이러한 취지를 먼저 선언케 할 것"을 내걸었다. 또한 그는 재판정에서 조선말로 말하겠으니 통역관을 세워달라고 요구했고, 재판관과 본인 모두 두 나라의 대표이니 앉을자리를 같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인 학살을 두고 세계 각국의 비난이 쏟아지자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던 일본은 그의 요구 중 두 가지를 들어주었다. 이에 박열과 후미코는 조선의 옷을 입고 재판정에 나섰고 박열은 당당하게 조선말로 답했다.
그리고 후미코는 자신을 박문자라고 소개하며 "현재에 있는 것을 때려 부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라고 했다.
또한 박열은 "천황이란 국가라는 강도단의 두목, 약탈 회사의 우상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했고, 이에 일본인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박열은 "조선 민족은 결코 일본화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인은 노예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리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법률이나 재판 가치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너희 마음대로 해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후미코 또한 "부디 우리 둘을 단두대에 함께 세워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난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재판은 두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두 사람은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박열은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하겠는가"라며 사형 선고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이후 형무소로 두 사람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겠다는 편지가 날아오고, 이를 박열은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의 아량에 경의를 표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신문 보도로 또 한 번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
사형 선고 이후 박열과 후미코는 서로 다른 형무소로 옮겨지고 서로 안부조차 전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4개월 뒤 후미코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형무소 독방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후세 다츠지가 찾아갔으나 이미 매장이 끝난 후였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후미코의 죽음, 그러나 진실 여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이 되며 독립운동가들도 석방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박열이 대역 사범이라 석방할 수 없다고 했고, 이에 동포들의 탄원이 빗발치자 22년 2개월 만에 그를 석방시킨다. 그리고 그의 석방에는 무려 만 오천여명이라는 환영 인파가 모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석방 후 박열은 재일 동포 단체를 만들어 장학 사업을 시작했고,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그가 찾아낸 것이 윤봉길 의사의 유해.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한 관리사무소의 입구이자 쓰레기 하치장 계단 앞 길바닥에 묻혀있어 일본의 비겁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1949년 영구 귀국한 박열은 아내 장의숙,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였다. 그러나 귀국 후 1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그의 아내는 어린 남매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고 더 이상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박열의 가족들은 박열이 북으로 납북됐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생사 여부도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16년이 흐르고 아들이 19살이 되던 해 박열의 아내는 지인을 통해 박열에게 아이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무사히 박열에게 전해졌고, 박열은 노인이 된 자신의 사진과 함께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라는 글귀를 담아 답장을 보냈다. 이에 그의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의 아들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89년 박열은 건국 훈장에 추서 됐다. 1974년 북한에서 사망한 박열은 사망 직전까지도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고, 이는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일평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의 아들은 "내가 박열의 아들인데 라는 마음이 있었다. 박열의 아들로서 이래야 당당한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을 늘 했다"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살기 위해 애썼음을 밝혔다.
방송 말미에는 박열과 함께 건국 훈장을 받은 또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도 공개됐다. 국적과 민족을 떠나 그와 뜻을 함께 했던 후미코와 다츠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던 것. 특히 후미코는 "죽으면 꼭 조선 땅에 묻히고 싶다"라는 바람대로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안치됐다. 또한 1953년 사망한 다츠지는 "난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형제들에게 사죄한다"라며 끝까지 일본이 저지른 죄를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관동대지진 대학살을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고 있다. 특히 그들은 9월 1일을 자연재해의 공포를 상기하는 날인 방재의 날로 지정하며 재해보다 더 참혹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에 우리만이라도 그날의 일을 절대 잊어선 안 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