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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디비전(Joy Division) 보컬 이안커티스(Ian Curtis)

na.rin 2022. 4. 1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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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n Curtis (1956 ~ 1980)

 

'이안 커티스'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활동했던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보컬이었다.

 

 

○ 밴드 결성 이전

 

대중음악으로 유명한 도시 맨체스터에서 나고 자랐다. 이안은 11세에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등 학업 성적이 나쁘지 않았으나 공부보다는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아 학업을 중단했다. 어린 시절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의 뮤지션들에게 심취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맨체스터와 메이클즈필드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1975년, 이안은 소꿉친구였던 데보라와 결혼한다.

 

1976년, 이안은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에서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을 만나 밴드를 결성하여 작사가 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밴드의 결성과 데뷔 앨범 <Unknown Pleasures>

 

밴드의 초기 이름은 '바르샤바(Warsaw)'였으나, 'Warsaw Pakt'라는 밴드와 혼동되는 일이 잦아지자 곧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밴드명은 소설 <The House of Dolls>에 등장하는 나치 수용소의 위안부 이름을 따온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파시스트 밴드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밴드명을 의식한 듯, 조이 디비전의 첫 번째 EP <An Ideal For Living>에는 '히틀러 유겐트'가 북을 치고 있는 그림이 앨범 아트로 쓰였다. (버나드 섬너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이 앨범에는 나치 전범 루돌프 헤스의 삶을 노래한 곡인 <Warsaw>가 수록되어 있다.

 

이안은 지역 명사 '토니 윌슨'이 그의 프로그램에 조이 디비전을 출연시켜주지 않자, 그를 '개XX'라 칭하는 등 공격적인 언어로 가득찬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 읽고 감명을 받았는지(...) 토니 윌슨은 조이 디비전이 그의 프로그램에서 <Shadowplay>와 <She's Lost Control>을 공연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후 조이 디비전에게서 가능성을 본 토니 윌슨은 직접 '팩토리 레코드'를 설립해 조이 디비전과 계약하게 된다.

이안은 특유의 무대 매너와 독특한 춤동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밴드의 데뷔 앨범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포스트 펑크를 대표하는 명반 <Unknown Pleasures>이다.

이 앨범으로 말미암아 밴드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라이브 공연을 이어가며 그들의 가치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 목을 옥죄는 사생활

 

<Unknown Pleasures>는 분명 대중에게 조이 디비전을 알린 작품이었지만, 밴드는 여전히 가난했고(팩토리 레코드는 밴드 수익의 50%를 가져갔다) 이는 이안의 가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정적인 공무원직을 포기하고 음악 산업에 뛰어든 이안 혼자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고, 이안의 아내 데보라는 돌봐야 할 아기가 있었음에도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나가야 했다. 자연스레 부부 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이러한 조강지처를 내버려두고, 이안은 '아닉 오노레'라는 벨기에 여자와 눈이 맞아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갔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웠던 데보라와의 관계가 파탄나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아닉 오노레'는 이안과의 관계에 대해 '불륜 관계가 아니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무엇보다 이안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의 고질병이었던 '간질'이었다. 이안의 발작 빈도와 강도는 매우 다양했고, 공연장의 조명이 그의 발작을 촉발하기도 했다. 이 병으로 인해 조이 디비전의 여러 공연이 축소되거나 취소되었고, 한 번은 발작을 크게 일으킨 후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춤과 조이 디비전의 대표곡 <She's Lost Control>이 이러한 간질 증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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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조이 디비전이 미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인 1980년 5월 18일, 이안 커티스는 23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이안은 이미 4월에 간질 약을 과다 복용한 후 병원에 입원한 이력이 있었다(이것이 자살 시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밴드의 미국 진출을 앞두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점에서 이미 아내 데보라와의 이혼 절차가 시작된 상황이었다.

 

자살 전날인 5월 17일, 이안은 데보라를 설득하여 그녀의 부모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집에 혼자 남겨지자 이기 팝의 음반 <The Idiot>을 들었고, 데보라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옷걸이의 밧줄을 이용해 부엌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 그 후

그의 죽음 이후, 조이 디비전의 마지막 앨범 <Closer>가 발매되었고, 롤링스톤 선정 500대 명반, NME 선정 500대 명반, NME 올해의 앨범에 선정되는 등 수많은 찬사를 받는다.

한편으로는 어둡고 허무주의적인 분위기가 극대화된 앨범이라 이안 커티스의 유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은 멤버들도 '가사를 분석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https://youtu.be/eyqWdoTwGHw

 

Cry like a child, though these years make me older

세월이 나를 나이 들게 함에도, 아이처럼 울고 있어

With children my time is so wastefully spent

아이들 때문에 내 시간은 너무나도 낭비되고 있지

A burden to keep, though their inner communion

그들의 내적 교감에도 불구하고, 간직해야 할 부담

Accept like a curse an unlucky deal

저주처럼 불길한 거래를 받아들여

 

- <Eternal> 가사 중 일부

 

이안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중 이안의 부고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우울한 마음이라도 추스르고자 관광 목적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신디사이저가 사용된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아 새출발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조이 디비전 결성 시 '멤버들 중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밴드명을 바꾸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은 밴드명을 '뉴 오더(New Order)'로 바꾸고 드러머 스티븐 모리스의 연인이었던 질리언을 영입한다. 그리고 이들은 80년대 신스팝의 전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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