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

베트남 후에 민간인 학살사건 1

na.rin 2022. 2. 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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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고도 후에(Hue)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도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968년 2월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후에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명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후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물리적인 통계를 약간 빌어야 할 것 같다. 후에에 공산주의자들은 총 1만 2천 명 정도가 구정공세 당시 들어왔다. 1968년 1월 30일 만월인 밤에 들어왔다. 그리고 26일간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의 와중에 5,800명의 후에 시민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실종자도 대부분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민간인들의 시체가 한 명 혹은 무리 지어서 투아 티엔(Thua Thien)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후에는 문화적인 베트남의 수도이며 전술적으로 매우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구정공세 당시의 자세한 일들은 언론에 자세하게 보도되지 않았다. 세계인의 양심에 별 상관이 없게 되었다. 북베트남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 후에 전투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 1967년, 10-11-12월. 월맹은 남베트남과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지역의 여러 곳에서 전면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이들은 사전에 준비한 물자를 바탕으로 여러 부대들이 연합하여 공세에 나섰다. 전투는 강렬했다. 이를 1단계로 본다.

2단계: 1968년 1-2-3월. 남베트남 전체적으로 월맹군과 베트콩들의 독립적이고 광폭한 전투가 있었다. 숫자도 많았고 소부대에 의한 상당한 전투가 있었다. 이들 각 소부대들은 광대한 지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으며, 훈련이 잘 되고 진보한 방식의 게릴라전을 벌였다. 1단계와 다른 것은 주 전투를 벌인 것이 베트콩이 아니라 월맹군이었다는 것이다. 남베트남에 약 5만 5천 명의 월맹군이 침투해 들어왔다. 1단계보다 강도가 엄청났으며, 베트콩을 포함한 총 7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총 32곳의 남베트남 인구밀집지역을 공격했다. 후에도 그 중에 한 곳이다.

3단계: 1968년 4월, 5월, 6월. 고립되거나 연합된 합종연횡 스타일의 공세. 전투들은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노획된 문서로 보면 월맹은 ‘구정공세 2파’격으로 공격으로 계획했다. 케산의 미 해병대 기지가 공격당했고, 월맹은 이것을 ‘2파’로 보았지만, 1단계와 2단계의 공격이 실패했기 때문에, 1-2단계의 확장에 따른 2파의 개념은 상실되고 말았다. 전쟁은 8년간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구정공세 기간 중에 미군은 3달 동안 가장 사상자가 많았는데, 일주일에 500명이나 전사했던 시점이기도 하다. 남베트남군은 거의 두 배가 전사했다. 그러나 월맹군과 베트콩들은 미군 전사자의 8배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 1967겨울-1968봄 전투의 시점으로 보면, 월맹군과 베트콩은 총 19만 5천 명 정도 밖에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2-3단계의 전체 9개월 동안 월맹/베트콩 중에서 죽거나 영구적인 불구가 된 인원은 총 8만 5천명이나 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후에 시가전은 2단계에 속한다. 후에는 월맹군이 주력인 전투였다. 월맹군은 이 후에에 두개의 사단이나 되는 병력을 투입했다. 지역게릴라부대도 일부 가담했고, 150명의 지역 공산당 세포와 간부들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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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전투 전개에 대한 간단한 요약

후에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주로 월맹군 800과 802대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힘차고 기동력 있게 후에로 입성했다. 첫날 공격 새벽에 월맹군은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예외가 있다면 남베트남군 1사단의 본부가 있던 곳과, 미군 고문관들이 있던 건물들뿐이다. 베트남군과 미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두 개의 중요한 거점에 도달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다른 월맹군 대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804대대였다. 그들은 미군과 베트남군의 증강군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차단에 실패했고 두 개의 거점에 미군과 베트남군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전투는 점차 포위공격전으로 변했고, 월맹군은 오래된 성채들과 도시 서쪽의 끝으로 몰렸다. 미군과 베트남군은 세 방향에서 월맹군을 압박했다. 포격과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월맹군이 숨은 성채들은 견고한 건축물들이었고 월맹 지휘부는 그곳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월맹군들은 가옥과 가옥을, 블록과 블록을 이어가면서 후퇴하고 있었다. 전투는 점차 느려지고 값비싸졌다.

성채는 지하에 공간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미군 해병대와 베트남군은 1미터씩, 1미터씩 전진하는 판이었다. 1968년 2월 24일 아침, 남베트남 1사단 병사들이 외벽에 24일간 걸려 있던 월맹깃발을 뽑아버렸다. 월맹군은 전투에서 졌다. 도시에서는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만이 이어졌고 점차 도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2,500명의 월맹군이 전사했고, 또한 다른 2,500 명 정도가 나중에 후에를 떠나 미군에게 추적당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미군은 총 357명이 전사했다.

 

이 혼돈의 전투 속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민간인에 대한 첫 번째 조치는 ‘긴급 구원’이라는 것이었다. 음식, 유행병의 예방, 긴급 의무 지원 등등. 그렇게 민간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후에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통계를 조사했다.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민간인은 1,900명으로 조사되었으나, 비공개적으로는 5,800 명 정도를 추산했다.

공산주의자에 의한 첫 번째 학살 희생자들은 지아 호이 고등학교 마당에서 2월 26일 170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 몇 달 동은 18개의 단체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탕 쾅 투 파고다 근처에서 67구가 발견되었고, 바이 다우 77구, 초 통 지역에서 약 100구, 황실묘지에서 201구, 티엔 함에서 약 200구, 동 지에서 약 100구, 총 해서 약 1,200 명의 사체가 바삐 암매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들 사체 중 반수는 매우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손이 등 쪽으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체들은 상처 없이 비틀려 있었다. 생매장된 것이다. 생매장 되면서 분대 규모의 군인들이 사격을 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체에 총 600개의 총구멍이 발견되었다.

두 번째 피해그룹들이 1969년 첫 7개월 동안 여러 군데서 다시 발견되었다. 남지나해 부근의 모래 둔덕에서는 매장도 되지 않은 800구 정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둔덕에 땅을 사망자들이 파게 한 뒤에 10-20명 씩 한 줄로 세운 뒤에 기관단총으로 살해되었다. (나중에 이곳에서 나온 러시아제 기관총의 탄피가 인기 있는 기념품으로 팔렸다) 3-4명 씩 죽여서 불태워 신분을 알 수 없는 사체도 많았다.

남 호아(Nam Hoa) 지역에서 세 번째 학살 증거가 나타났다. 다 마이 강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푸 캄 죽음의 행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1969년 9월에 발견되었다. 3명의 공산주의자 망명자들은 미 101공수사단 여단 정보장교에게 다 마이 강가에서 수 백 명의 민간인을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다 마이 강변은 후에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들은 그 학살이 1968년 2월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지역은 매우 거칠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사실상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이 증언에 따라서 101사단의 여단이 그곳을 수색했고, 많은 사람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이 파편 같은 정보의 조각들은 다 마이 강가의 학살의 의미를 조합하게 해 주었다. 1968년 테트 공세의 15일째, 후에의 일부인 푸 캄 소도시에는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 4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를 피하고자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카톨릭 신자들이 오히려 아니었다. 공산당 정치위원이 이 성당에 도착했고, 400 명 정도의 민간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 정치위원은 ‘해방지구’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3일간의 재교육을 시킨 뒤에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공산주의자들의 본부가 있는 후에의 파고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때 20 명 정도의 사람이 이름이 불려서 그룹에서 이탈했다. 그들은 파고다가 있는 안뜰에 집합되었고 모두 월맹군에게 살해되고 불태워진 뒤에 암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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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처형되고 나서 나머지 민간인들은 강을 따라서 계속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베트콩부대에 인계되었다. 그 당시 그들을 인계한 정치위원은 아마도 재교육을 시킨 뒤에 민간인들을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계가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많은 인원으로 인해서 며칠간 일대는 많은 도망친 민간인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때 지역 베트콩들은 증거를 없애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결국 민간인들은 강변의 6킬로미터에 걸쳐 총에 맞거나 도륙된 뒤에 흐르는 물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들은 일대에 끌려온 사람들을 찾는 대로 모두 학살했다.

101사단의 여단은 그곳으로 향하면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강변에 도착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강변의 수풀은 엄청나게 두터웠다. 나무와 풀들이 두개의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나무들의 가지는 높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쪽은 거의 대낮에서 어둠에 가까웠다.

 

여단 공병은 길을 내기 위하여 그 두터운 수풀에 다이너마이트로 뚫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그리고 헬기의 랜딩존도 만들어야 했다. 사체들이 발견되면 헬기로 운구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매장 없이도 사체를 감추기에 매우 쉬운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수백 미터의 협곡이 있었고, 그 안에 수많은 해골들과 인간의 뼈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냥 지상에 버려져 있었다. (동양인들은 사람이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방치될 경우 영원히 지상에 외롭게 남는다고 생각한다) 이후 20개월이 지나자 시체들은 점차 햐얗게 뼈로 변해갔다.

다 마이 강가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총 428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혁명의 반역자’라고 규정했다. 이들 428 명 중에 군인은 25% 정도였고 두 명의 장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하사관과 사병이었다. 다른 25%는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50%는 마을사람, 마을 서기, 고용인,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관청 공무원 등이었다.

네 번째 학살의 증거들이 다시 나타났다. 푸 투 지역의 소금밭에서 1969년 12월 발견된 것이다. 이는 루옹 비엔이라는 어촌 지역으로, 후에에서 동쪽 1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이 또한 매우 황폐한 지역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1968년 연초부터 이 지역의 베트콩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강한 노력을 들였던 지역이다.

 

이 루옹 비엔의 인구는 약 700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은 지역 베트콩의 보복이 20개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다 청소되자 주민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사람은 적어도 300명, 그리고 최대 1천명으로 추산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후에의 공무원들이 조사를 벌였으나 정확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중인 상태로 조사를 끝냈다.

후에 전투 후에, 남베트남 정부는 민간이 부상자만 7,600 명을 추산했고, 이들 중 1,900명은 전투행위 중간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전투행위 중간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5,700명으로 추산했고, 첫 번째 밝혀진 민간인 학살 사체의 수는 4,756구였다. 두 번째 발견된 학살에서 모래 둔덕 학살을 합하여 3,583구, 세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다 마이 강변을 포함 2,774구, 네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총 2,356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룹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사망자가 2천 구 정도 더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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