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심의 몬스터
1939년 6월 21일 브라질 세치라고아스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루이즈 바우
약초에 해박했고 민간요법도 두루 섭렵한 루이즈는 부모의 사망 후 동생과 재산 다툼을 벌였고 동생의 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뒤 샤페코로 이주를 하게 된다.
1967년 10월 7일 지역 농장의 딸과 결혼한 루이즈는 평범하게 살아가나 싶었지만 아내와 사이가 나빠지며 이혼을 했고 1974년 인근에 있는 히우그란지두술로 이주한다.
체력이 좋고 여러 민간요법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곳에서 17명의 자식을 홀로 키우고 있는 마리아 자르펠론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마리아는 여러 지식을 갖고 있어 일생활에 도움을 주는 그가 필요했고 그는 자신이 머무를 곳이 필요했기에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루이즈는 마리아의 아이들 중 유독 프란시스 코오 친밀했는데 어릴 적부터 천식을 앓고 있던 프란시스코는 루이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밀함을 넘어 둘이 아침 일찍 외출해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자 가족들은 둘의 관계를 의심했고 장남이 군대에서 돌아왔을 때 둘의 관계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전달받고 그는 맹렬하게 그들을 비난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 그래서는 안된다며...
결국 가족들은 프란시스코를 가톨릭교회 신학교로 보내자는 결정을 내렸고 1975년 2월 26일 프란시스코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말을 타고 방앗간으로 향했고 마리아는 루이즈에게 프란시스코를 신학교로 보낸다는 말을 꺼냈다.
루이즈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그동안 벌었던 돈의 일부를 프란시스코를 위해 남기고 싶다 말하며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 전한 뒤 사라졌다.
모든 게 좋게 끝이 나나 싶었지만 심부름을 갔던 프란시스코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으며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갔다.
루이즈는 떠난다며 사라진 상태에 심부름을 보냈던 자신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마리아를 비롯해 가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가족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프란시스코를 찾았고 식료품점 주인으로부터 어제 루이즈와 프란시스코가 함께 어딘가 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함께 도주를 했다 생각에 허탈해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들이 타고나간 말과 안장에 묻어있는 혈흔이었다.
마리아는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경찰에 신고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였고 이틀 뒤 인근 예배당 정원에서 사망해있는 프란시스코가 발견된다.
그는 곡식 자루에 넣어져 있었는데 훼손 정도가 심했다고 한다.
인근을 배회하던 루이즈는 곧 체포되었고 그는 자신을 배신한 그를 벌할 목적으로 살해 한 뒤 예배당 근처에 두었다 자백했다.
법의학 정신 연구소로 이송된 그는 그곳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라 진단 받앗고 1979년6월28일 에 징역 4년 7개월을 선고받는다.
에레심 주립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시작한 그는 교도관의 말을 잘 듣고 별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모범수였다고 한다.
감옥에선 모범수의 경우 좀 더 자유로움을 보장해 주었는데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소 일이 얼마 남지 않은 모범수는 인근에 있는 아에로포르토 농장에 사역을 나가곤 했는데 루이즈 역시 그런 사역을 나가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1980년 1월 20일 사역을 하던 루이즈가 사라진 날 탈옥이었다.
탈옥 후 그가 한 행동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년들을 해치는 행동.
프란시스코 때와 마찬가지의 흔적을 소년들의 몸에 남기며 그는 인근 일대를 돌아다녔다.
2월 15일까지 한 달 동안 3명을 살해한 그는 4번째 범행 시도 중 소년의 아버지에게 들키며 도주했다.
그가 도주한 장소는 아에로프르토 농장이었고 그는 농장 주인을 해하고 물건들을 훔쳐 달아났다.
에레심으 주민들은 그를 에레심의 몬스터라 부르며 두려워했고 그의 주된 범행 대상이었던 소년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군대까지 동원되며 루이즈의 수색이 강화되었고 2월 21일 결국 그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다시 체포되었다.
주민들은 그가 감금되어 있는 곳에 몰려들어 살 자격이 없다며 린치를 원한다며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그는 다시 한번 법의학 정신 연구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삼엄한 감시를 받지만 1980년 7월 1일 그는 4명의 다른 수감자들과 다시 한번 탈옥에 성공한다.
예정대로라면 1984년 3월 26일에 재판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 사이 두 번째 탈옥을 하며 법원은 그가 없는 상태로 재판을 진행해야 했다.
1985년 4월 3일 그의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2005년 4월 4일에 공소시효가 끝나며 그는 수배자 명단에서 제외되며 정부는 희생자 가족들에게 3,900달러를 지급했다.
탈옥했던 4명의 수감자들은 곧 잡혔지만 루이즈는 잡히지 않아 인근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범죄의 심각성 때문에 정부 비밀 요원들에게 암살됐다는 소문과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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