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부 센난군에 위치한 약 4만 명의 인구가 사는 구마토리정.
평소 조용한 동네인 이곳에서 1992년 4월 29일 부터 7월 2일까지 65일간 7명의 젊은이가 잇달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중 2명이 사고사, 5명이 자살로 결론 났지만 그들의 죽음에는 의문스러운점이 가득했다.
1992년4월29일 금속공장에서 판금공으로 일하던 A는 그날 친구들과 함께 시너를 흡입하고 있었고 시너 흡입시 정신이 몽롱해지고 여러 환각증세를 보이는데 A역시 그러한 상태였을 것.
그는 갑자기 수영!이라 외치더니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는 연못으로 뛰어들었고 잠시 후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심부전으로 그의 사망은 사고사 처리되었다.
정확히 1개월 뒤인 5월 29일 A의 중학동창인 B가 자신의 방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는데, 평소 시너를 자주 흡입하던B에게 어머니가 제발 끊으라 말렸으나 몰래 방에서 흡입하다 심부전으로 사망한 것.
6일 뒤인 6월 4일 양파 저장고에서 목을 매 사망한 C가 발견된다.
그날 그느 자정 무렵 집에 돌아왔다가 2시간 뒤 다시 외출했고 오전 5시 무렵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
그의 주머니에는 '빚을 갚아 주세요.'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꼬 자택 불단에는 그가 돈을 빌린 친구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액수가 크지 않았던 점과 지인들의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자살이라 결론 내리며 사건을 조기 종결했다.
그가 가끔 지인들에게 흰색차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말했음에도 경찰들은 무시했다.
7일 뒤 C와 친했던D가 자신이 과거에 살던 집의 헛간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다.
당시 그는 여자친구가 임신해 결혼할 예정으로 신혼집을 구하던 상태였고 사망 전날에는 어머니에게 보온 도시락을 준비해 달라는 등 전혀 자살동기가 없던 남성.
특히 절친했던 C의 장례식장에서도 왜 죽었냐며 울고 분노하며 친구들에게 '고민이 있으면 꼭 말해달라며 C의 몫까지 열심히 살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 D는 어머니에게 최근들어 흰색차가 따라다닌다 말했고 그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며 아들이 살해됐을 것이라 주장했으나 경찰은 역시 자살로 결론내렸다.
7일뒤인 6월 17일 C,D와 친했던 여관 종업원인 E가 밭 바로 옆에 위치한 농기구 창고에서 목을 매 숨진채 발견된다.
앞선 사건과는 좀 달랐던 것은 그의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번에도 옷이 깨끗하고 현장에 싸운 흔적도 없다며 자살이라 결론내렸다.
손이 등 뒤로 묶인것이 이상했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묶을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 경찰의 주장.
경찰은E가 사망 전날 6개월만에 만난 예 애인이 결혼한다고 이야기하자 친구들에게 밧줄있냐는 말을 했다며 이를 동기라 주장했으나 사실 이것은 가끔 장난으로 하는 자살마렵다 라는 뉘앙스였다는 것이 친구들의 주장이었음에도 경찰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자살이라 결론내렸다.
8일뒤인 6월 25일 키시와다시 직원인 F가 나무에 목을 매 숨진채 발견된다.
앞선 사건과 달랐던 점은 그는 밧줄이 아닌 분홍색 와이셔츠를 끈으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
목을 맨 나뭇가지가 f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였고 그가 나무를 탄 흔적이나 디딜마한 물건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또 자살로 방향을 잡았다.
F는 사건 당일에도 평소처럼 도시락을 싸서 출근했고 직장동료들은 그가 무단결근도 없는 성실하고 호감 가는 청년이었다 주장하며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리 없다 주장했지만 경찰은 끝내 자살로 결론 내렸다고 한다.
7일 뒤인 7월 2일 저녁, 오사카 체육 대학에 다니는 육상선수였던 G가 동네 운동장 옆 도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다.
그녀의 가슴에 나 있는 자상과 근처에 떨어져 있던 과도.
발견 당시 숨이 붙어있던 그녀는 다르다라고 호소하며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 출혈로 사망.
장소가 주택가였던 점과 이틀전 1,000m달리기에서 자기 기록을 경신했고 8월에는 본가에 가 예정이라 평소 좋아했던 프로그램을 녹화해 달라는 부탁도 했기에 그녀의 부모님은 딸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최근 그녀가 검은차에 쫓긴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경찰에 알렷지만 경찰은 G의 왼쪽 가슴에 생긴 치명상 외에도 목덜미에 망설임을 가졌던 주저흔이 있다며 이번에도 자살이라 결론을 내렸다.
65일 동안 남성 6명, 여성1명이 사망했고 그 중 2명이 사고사, 5명이 자살이라 결론 내려진 이 사건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확인 결과 마지막 사망한 F와G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접점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A와B는 중학동창, B와 C,D는 바이크 동료, C와 D는 바람이라는 폭주족을 만든 창립 멤버였고 E는 폭주족의 일원.
폭주족의 리더였던 D의 경우 불량했지만 인망이 두터워 그의 장례식 때는 400명이 넘는 이들이 방문했다고 한다.
그를 가르쳤던 중학교 교사는 D는 불량하지만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았다며 언젠가는 높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죽음이 앞선 A와B의 사고사를 접한 뒤 일으킨 연쇄 자살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유명인 또는 평소 존경하거나 선망하던 이가 자살할 경우 그 인물과 동일시해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인 베르테르 효과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구마토리정에 위치한 교토 대학 원자로 실험소에 관한 이야기.
원자력 연구 기관이었떤 이곳에는 당시 6명의 전문가들, 통칭 '구마토리 6인방'이 있었는데 그들은 탈원전을 외치는 이들이었다.
사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이들은 당시 출세하지 못했고 심지어 여러 위협을 당했는데 '구마토리 6인방'중 몇 명은 탈원전에 관한 강연을 갔다오면 전력회사직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자주 미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미행할 때 사용했던 차가 C와D가 자신을 쫓아 다닌 차라 주장했던 흰색차와 동일했다.
1991년 에히메현에 있는 이카타 원전 유치에 관한 법정 싸움에서 '구마토리6인방'은 당연히 탈원전을 외치며 반대입장에서 섰고 1992년에는 대법원 판결이 나올 예정이었는데 이시기 구마토리정에서 위 사건들이 일어난 것.
재판은 1992년 10월에 원전 찬성파의 승리로 끝났고 이 뒤로 구마토리정에서 사망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구마토리6인방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지말라는 위협과 동시에 세간의 눈을 돌리기 위해 A와B의 사고사를 계기로 다른 5명의 젊은이를 자살로 위장해 살해했다는 추측이었다.
아직 정확한 사건의 경위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경찰 당국은 2건의 사고사, 5건의 자살이라 결론내렸고 지금도 여러 구설에 오르는 구마토리정 연쇄 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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