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8월 13일경
그는 약 2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그의 숙부 집에서 4일 동안 얹혀 살며,
이웃으로부터 삽과 낫을 빌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구덩이를 팠다
그의 고향이 곧 그의 본관이어서 조상들의 묘소가 뒷산에 있었는데,
숙부는 그가 벌초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1994년 8월 5일 ~ 8월 15일
온보현은 구체적인 살인계획을 세우고 살인수첩에 기록을 함.
살인계획을 세우다 보니 전에 자신이 택시기사를 했던 일을 생각하고
차고에 세워져있던 강북수유리의 국제운수 1바 1287 스텔라 차량을 절도하고
미사리쪽에서 대진운수 1바 1237로 번호판을 위조함.
1994년 8월 28일경
그는 강동구 암사동 사거리에서 한 명의 여성을 태웠다.
그는 흉기로 여성을 겁박해서 학생증을 뺏은 후,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차문을 여는 순간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며 영동고속도로 이천 부근에서 도망쳤다.
그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뒤쫓지 않은채 그대로 도주하였다.
1994년 9월 1일
며칠 숨어지낸 뒤 곤지암주차장에서 택시회사와 번호판을 바꾸고
다음날 새벽 거리로 나가 새벽 1시~3시경 43세의 권모씨를 1회 성폭행 후
자신의 고향인 김제영천마을 야산으로 끌고가 자신이 파놓았떤 구덩이 옆에서
1회 추가로 성폭행 후 입과 팔다리를 포박한뒤 구덩이에 밀어넣음.
잠깐 숲근처에서 잠을 자고 있던 사이 피해자가 도주하여 인근 곳장의 인부에게
발견되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감.
온보현은 근처에서 숨어있다가 자신의 택시를
경찰이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대전으로 택시로 도주.
이후 경찰이 5년간 수유리 근처의 택시기사 이력서들 사진과 피해자의 대조심문으로
온보현이 범인이라는걸 파악
1994년 9월 11일
저녁 8시 30분경 서울 독산동 부근에서 21세 학생 엄모씨를 태운후 올림픽대로에서
칼로 위협,
그 후 강원도 횡성 야산으로 끌고가 2회성폭행후 나무에 포박후 살인하지 않고
2차 범행을 하러 간 사이 피해자는 포박을 풀고 도주
1994년 9월 12일 (1차살인사건발생)
저녁 8시 30분경 양재동부근에서 26세 회사원 허모씨를 태워 서초톨게이트부근에서
칼로 위협, 전날 엄모씨를 포박했던 야산으로 끌고 갔으나 엄모씨가 도주한 것을 알고
분노한 온보현, 허모씨를 구타하고 다시 나무에 묶고, 얼굴, 무릎, 다리 등을 삽으로
가격후 도주함, 허모씨는 사망.
온보현은 풍납동 신한은행지점에서 피해자 허씨의 외환은행카드로 61만원을 인출함.
1994년 9월 13일
강동구 천호동 4거리부근에서 19세 회사원 노모씨를 태워
중북고소도로진입후 칼로 위협을 가한후 김천여관으로 와서 성폭행함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말도 고분고분 잘듣고 차분했기에 피해자와 이야기하던중
피해자가 가장이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자기가 혼자 식구들을 먹여살려야한다는 말에
묘한 감정을 느끼고 14일 새벽 고덕동 집앞까지 바려다줌
1994년 9월 14일(2차살인사건발생)
가락동에서 24세의 아동복지학과 교사 박모씨를 태우고 올림피아파트앞 4거리 부근에서
칼로 위협했으나 심한 반항에 온보현 자신의 손이 칼에 베임.
흥분한 범인은 피해자의 배, 허벅지 등을 5차례 찔러 살해후 경북금능군 도로변에 시체유기.
이후 부상치료와 은신을 위해 서울 천호동 C여관 3층구석방에서 13일동안 은신 후
손가락 부상으로 범행중단을 함.
이때도 경찰은 온보현의 행방을 찾지 못함.
1994년 9월 20일
지존파가 검거.
이와 함께 온보현과 관련된 강력 범죄 사건 공개 수사가 시작됨.
대대적인 공개 수배와 더불어 그가 택시 기사이자 범행에 택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어 불심 검문 탐문수사가 시작된 것.
1994년 9월 27일
그는 당시 지존파를 검거하여 유명해졌던 서울 서초경찰서 입구에서
의경에게 "자수하러 왔다" 고 말하며 자수.
그는 경찰 조사에서 밝히기를,
"지존파와 나를 비교해보고 싶다.지존파와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 고 청원.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자수를 했으니 선처가 될 리 없었음.
그가 바랐던 것과 같이 온보현은 지존파 못지않게 매스컴에 대서 특필되었던 것은 물론
다음 해인 1995년 11월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생을 마감.
1994년 10월 31일
서울지검 강력부 박충근 검사는 온씨가 훔친 택시를 이용하여 부녀자 여섯 명을 납치하고,
이 가운데 두 명을 살해한 혐의를 들어 그를 구속 및 기소한지 18일 만에 사형을 구형.
1994년 11월 14일
서울형사지법 합의 25부(재판장 김주형 부장 판사)는
피고인 온보현(37)에게 강도 살인 및 시체유기죄 등을 적용하였고,
앞서 구형된대로 사형을 선고.
1995년 2월 24일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
1995년 11월 2일
그는 지존파 등 19명과 함께 사형.
<범죄의 재구성>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같은 흉악범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력 범죄자들에게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 줄 것이며, 형을 신속하게 집행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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