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

일본 도쿄도 도시마구의 제국은행 독살사건

na.rin 2022. 4. 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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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도 도시마구의 제국은행 독살사건

 

1948년1월26일

일본 도쿄도 도시마구의 제국은행 시나마치 지점 폐점시간인 3시에

방역반이라는 완장을 찬 중년남성이 들어오게 되는데 자신을 위생,보건,복지 등을 담당하는 후생성의 야마구치 지로라 소개하며 명함을 건넸던 남성.

 

인근 지역에서 집단 이질이 발생했고 잠시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은행에 소독하러 오기 전에 자신이 준비해오 예방약을 먹으라 지시했고

사람들은 의심했지만 접종 시범을 보여주며

스스로 약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의심이 풀렸다고 한다.

감염자가 은행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에 직원16명은

서둘러 약을 복용했고 치아가 손상되지 않도록 혀를 내밀어 마시라는 등의

전문적인 말을 하며 직접 복용까지 했으니 사람들은 안심하고 복용한것.

 

1분 후 사람들은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남성은 2차 예방약을 먹으면 괜찮아진다며 약을건넸다.

잠시 후 사람들이 하나둘 실신하며 쓰러졌고 그것을 지켜보던 남성은

은행에 보관중이던 현금과수표 16만엔을 들고 사라졌다

현장에서 11명이 사망하고 병원으로 옮겨진 이들 중

1명이 추가로 사망하며 총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

 

사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두 군데 은행에서 비슷한유형의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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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10월14일

자신을 후생성의 마츠이 시게루라 소개하며 명함을 건넨 남성은

똑같은 수법으로 약을 먹였으나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1948년1월19일

후생성의 야마구치 지롤 소개하며 명함을 건넨 남성은 이질환자의 발생으로

예방약을 먹어야 하고 돈을 소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의심한 지점장이 보유중이던 현금은 아까 이송했고

소량만 남았다고 답하자 남성은 남아있는 돈에 투명한 액체를 뿌리고 사라졌다.

7일 뒤 남성은 제국은행에서 같은 수법을 범행을 저지르며 12명으 사망자를 내고 달아난것.

 

부검결과 피해자들의 몸에서 청산화합물반응이 나왔고

범인이 사용한 청산은 0.2~0.5g으로 딱 치사량에 해당하는 양이였다.

즉 범인은 최소한의 양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을 알고 있는 인물이고

독극물을 다뤘던 적이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범인이 약을 분배할때 사용한 스포이트는 육군 연구소에서

쓰이는것이었고 그가 들고 다닌 상자 역시 군의관들이 주로 쓰는 상자와 유사했다고 한다.

경찰은 청산 화합물을 주로 취급하며 각종 세균 실험을 했던 731부대,

육군제9연구소 관계자들을 의심했으나 돌연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육군 관계자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결국 경찰은 다른 단서를 통해 색출해야 했고 그들이 다시 주목한것은 명함이였다.

두번재와세번재범행에서 그가 건넨 야마구치지로라는 명함은 가짜였고

처음 건넸던 마츠이 시게루는 실제 그의 명함이라는게 밝혀졌고

조사결과 명확한 알리바이가 존재해 경찰은 그의 명함을 받은 인물 중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생각하며 수사를 이어나갔고

다행히 마츠이는 자신이 명함을 건네준 상대의 이름, 날짜와장소를 기록하고 있어 용의자를 추려낼수 있었다.

100장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마츠이는 총 92장의 명함을 다른이들에게 주었고

경찰은 62장을 회수, 분실되어 사건과 관련없다 확인된 22장을 확인했고 남은 8장의 명함 중

1948년8월21일 화가인 히라사와 사다미치를

제국은행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히라사와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지만,

검찰은 그를 2건의 미수사건과 제국은행 사건에 대한

용의로 고소했고 그는 체포되며 심문을 받았다.

1949년까지 일본은 경찰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했더라도

그로 인해 받아낸 자백은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처음 자신의 범행을 부인한 히리사와는 한달의 심문 끝에

자신이 범인일 자백하게 되고 12월20일에 열린 재판에서 히라사와는 자신의 무죄를 다시 주장했다.

 

고문에 가까운 취조와 심문을 당했고 자신이 광견병예방접종의 부작용에 따른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며 주장했으나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는 기각.

1955년4월7일에 상고마저 기각되며 5월7일 사형이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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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사와의 구명운동에 나선 이들은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의문점을 발견하게되는데 첫째로 히라사와는 독에 관해

전문지식이없었는데 범인은 정확한 치사량의 독을 피해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기자는 독이 육군 제 9연구소에서 개발한 '나이트릴 시안산염'이라고 주장했고

청산의 경우 즉시 효력을 발휘하지만,

'나이트 시안산염'은 1~2분 후에반응을 하고 그의 주장처럼 범행에 사용된 독이

'나이트릴시안산염'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보관상태가 좋지않아 추측으로만 남았다.

 

둘째로 3건의 범행에서 범인을 본 많은 은행직원중 히라사와를 범인일 지목한 이는 단 두명.

범인은당시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어 후생성에서 왔다며

자신을 소개하고 이상행동을 했던 그를 은행직원들이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구금 당시 히라사와는 은행직원들과 대질심문을 받기도 했으나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단언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범인이라 지목한 이는 2명뿐이니 사람들은 은행직원들이

검찰로부터 모종의 협박이나 회유를 받은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셋째로 사형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히라사와의

자백조서 3통이었는데 이는 검사가 그에게 백지를 주며 지문을 찍게했던 서류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의문점들을 찾아내며 히라사와의 구명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통해 재심청구와 특사요청을 했으나 거부당했다.

 

제국 은행사건이 발생하고 6년뒤인

1954년 이바라키현에서 자신을 보건소 직원이라 소개한 남성이 사람들에게 청산을 먹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으 수법이 제국은행사건과 동일해 체포된 범인을 사람들은 과거사건과 연관지어 의심했지만 그가 감옥에서 음독자살하며 진실은 밝혀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구명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여러 의문점을 공개하며 대중의 구설에 오르자 법무대신들은 히라사와의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몇몇 이들은 사건 후 히라사와가 밝히기를 거부한 예금의 출처를 의심했지만 명예가 실추될까보 춘화를 팔았던 것을 공개하기 꺼렸던 거라는 반박도 있었다.

1987년5월10일

히라사와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다 95세의나이로 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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