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죄로 잡힌 미국 여성 도쿄 로즈 '아이바 토구리'의 이야기
아이바 토구리는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선전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도쿄 로즈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1916년 7월 4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미국에서 취직준비를 하던 중 어머니의 부탁을 받게되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일본에 있는 자신의 동생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딸에게 선물을 쥐어주며 병문안을 보냈고 그녀는 가기싫었으나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가게된다.
토구리는 그렇게 일본에 처음 방문했고 그곳은 모든것이 낯설었다.
1941년 미일관계가 험악해져 있었고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갈 날에 일이 터지고 만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것인데 이로 인해 그녀는 일본에서 출국 제한을 받았고 일본 비밀경찰이 그녀를 찾아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일본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적국으 시민으로 취급되어 그녀가 머물고 있던 이모집안은 식량배급카드를 받지 못했다.
결국 그곳에서 벗어나 하숙집을 얻어 나가게 되었고 지속적으로 미국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 안부를 주고 받았다.
1942년 미국 정부는 일본계미국인들을 체포하여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고 토구리의 부모님 역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면서 부모님과의 연락이 끊겼고 가지고 온 돈도 다 바닥나자 일자리를 찾기위해 돌아다니던 중 1943년11월 일본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하게 된다.
그들은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용 영어방송의 진행자를 찾고 있었다.
별다른 아나운서 교육을 받지 않은 그녀지만 목소리가 좋았고 영어를 잘해 진행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라디오 진행자들은 미군에선 도쿄 로즈라 불렸다.
도쿄 로즈라 불린 진행자는 14명에 달했지만 유일하게 알려진 인물이 아이바 토구리.
그녀는 연합군 포로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거나 의미없는 말장난을 하는 등 소소한 잡담을 하며 진행했다.
사기 저하를 의도한 방송이었으나 이를 듣는 미군들은 그저 나긋나긋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목적밖에 없었고 내용이나 진행에는 별로 신경쓰지않았다.
추후 참전용사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대다수의 인원이 그들이 방송한 라디오 자체는 프로파간다로 느꼈지만 사기가 저하되었다고 느낀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 프로 파간다란 어떤 이념이나 사고방식 등을 홍보하거나 설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녀만은 프로파간다에 속하는 내용을 방송하지 않았고 월 150엔의 월급을 받았다.
그 돈은 대부분 식료품구매에 사용하였으며 남는 금액은 연합군 포로들의 의료비나 사식비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녀는 여전히 고향인 미국을 그리워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그곳을 갈수없었고 1945년8월14일까지 총 340회의 방송을 진행했다.
1945년 8월 15일 미군은 일본에 두개의 핵폭탄을 투하했고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다.
전쟁이 끝난 뒤 베일에 싸인 도쿄 로즈에 관해 미국기자들은 취재를 나갔으나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그녀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일푼이었던 아이바 토구리는 미국 언론사와 독점인터뷰로 2000달러를 받기로 했고 이로 인해 유일하게 알려진 도쿄 로즈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그녀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것인데 결국 그녀는 인터뷰 후 1949년 10월 6일 체포되었다.
죄명은 반역죄, 그녀는 미국 역사상 반역죄로 기소된 일곱번째 인물이 되었고 13주에 걸친 재판에서 8건의 반역죄 혐의 중 1건의 반역죄로만 기소되어 방송국에서 받을 예정이던 2000달러는 받지 못했고 그녀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그녀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으나 당시 미국은 반일감정이 극도로 달한 상태였고 보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미국인이면서 일본 라디오 방송으로 반미선전을 퍼뜨렸고 생각되는 그녀는 좋은 표적이었다.
그녀의 반역행위를 증언하는 증인이 나타났고 결국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벌금 1만달러, 징역10년, 미국시민권박탈을 선고받는다.
6년만에 풀려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0대에 접어든 그녀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였고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미국에 왔으나 시민권마저 박탈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반역행위를 증언했던 증인들이 거짓진술로 밝혀지면서 1977년 제럴드 포드대통령은 그녀를 사명했고 후에 그녀는 그날을 용서의날이라고 표현하며 아버지가 용서의 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게 가장 슬프다고 말했다.
임종직전 그녀의 아버지는 "너는 호랑이와도 같아. 호랑이의 줄무늬는 절대 바뀌지 않지.너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미국인이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2006년1월 미국 2차대전 참전용사회는 그녀가 어려운 상황속에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고 포로들에게 식료품과 의료품을 전해주었던 용기에 시민상을 수여하였고 시카고에서 조용히 살던 그녀는 2006년 9월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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