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에 남은 잿가루
다그마르 요한네 애밀리 오버바이는 덴마크에서 악명 높은 연쇄살인자 중 한명이다.
1887년에 덴마크 오르후스에 있는 작은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삶에 항상 우울한 마음을 안고 살았고 학교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방황의 길로 빠져들었고 12살때부터 이웃의 지갑을 훔치는 등 여러 나쁜짓을 하고 다녔다.
부모님은 다그마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다른 집의 잡일을 시키며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알려주려 했지만 천성부터 틀려 모든 불행은 자신의 주변탓이라 생각하던 그녀에게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의 도둑질은 멈추지 않았고 감옥을 자주 들락거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2년에 옌스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임신을 하게된 다그마르를 옌스는 탐탁지 않게여겼다.
당시 덴마크 사람들은 혼외자녀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그마르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남들 몰래 입양보내야했다.
그녀가 두번째 임신했을 때 다그마르는 그에게 결혼하자 말했지만 옌스는 거절했고 두번째 아이마저 입양을 보내게 된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다그마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이사를 와 가게를 차렸다.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않고 항상 도둑질만 하던 그녀에게 가게의 경영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도둑질을 하던 삶을 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전문 아동 보호자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과 같이 혼외자녀를 두어 곤란해하고 있는 이들을 돕겠다는 명목하에 그녀는 비공식 입양 기관을 설립했다.
1916년4월15일 그녀의 입양 기관에 첫 아이가 맡겨진 날이다.
아이를 그녀에게 맡긴 여성은 일정금액을 주며 아이의 아버지가 매달 돈을 지급할 것이라 전하고 자리를 떠났다.
몇 일 뒤 인근 지역 묘지의 공중화장실을 관리하던 청소부는 화장실 내부에서 사망해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물론 이때까지도 그 아이가 다그마르의 입양기관에 입양된 아이였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다그마르의 첫 살인이었다.
아이를 맡긴 대부분의 사람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아 그녀의 범행은 지속해서 이어졌다.
들키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범행은 1920년 8월 카롤린이라는 여성이 아이를 맡기면서 모두 드러나게된다.
기독교 집안 출신의 카롤린은 다그마르에게 아이를 몰래 입양 보냈고 선불로 일반 노동자들의 1년치 봉급을 줬다.
많은 돈을 한번에 얻어 신이 난 다그마르는 평소처럼 카롤린이 떠나자마자 난로에 불을 붙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다음날 카롤린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며 다그마르를 찾았고 아이를 돌려달라 말했고 다그마르는 당황했을 것이다.
이미 그녀의 아이는 난로에게 까맣게 재로 변해있는 상태였으니깐...
다그마르는 카롤린에게 아이를 어제 다른 곳으로 입양 보냈다 둘러댔고 카롤린이 입양 간 주소를 물어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자리를 피한 다그마르.
결국 카롤린은 그녀를 신고했고 그동안 숨겨왔던 다그마르의 범행은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다그마르의 집에서 발견된 수십 벌의 아이 옷, 난로에 남아있는 유해, 집 인근에 파묻힌 흔적들 확인된 수만 9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25건의 범행을 저질렀다 자백했지만 정확한 물적증거가 남은 9건에 관해서만 재판이 이뤄졌고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10세는 여성들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라고 밝혀 결국 종신형으로 감형된다.
1929년5월6일 다그마르는 42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범행으로 인해 덴마크에서는 혼외자녀에 대한 최초의 합법적 보육 조항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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