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월곡동 황금장여관 모녀 살인사건 성낙주사건
1996년 6살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애런은 미 육군에 입대해 친부모를 찾기 위해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애런의 사연에 각종 매스컴을 타며 전국에 알려졌고 자신이 그 친아버지라 주장하는 남성이 나타난다.
남성의 이름은 성낙주.
1995년12월21일에 사형을 선고받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사형수
2000년7월28일에 극적으로 상봉했던 부자.
"사형수와 아들, 27년만의만남" 이라는 감동적인 미담이라 바료했던 언론.
하지만 3년뒤인 2003년에 한 방송사가 그들의 사연을 제작하면서 유전자 검사를 했을때 두 사람은 친자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에 놀랐다.
사람들은 사형수였던 성낙주가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 감형을 놀렸다고 말하며 정확한 확인도 하지 않고 그저 특종에 눈이 멀어 보도를 앞다툰 언론을 비난했다.
1951년 충청북도 제천읍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여러일을 하다 결혼해 세 아이를 두었던 성낙주.
결혼생활이 완만하지는 않아 아내는 집을 나갔고 결국 세 아이를 부모에게 맡긴 그는 속세를 벗어난다며 태고종에 입적, 승려가 됐다.
하지만 승려가 된지 8년뒤 그는 승적을 박탈당하고 떠돌이 생활으 하다 서울로 상경을 결심한다.
1993년 초 서울로 올라온 성낙주는 절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도봉구에 점집을 차렸다.
손님들 대부분이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였고 성낙주는 그런사람들의 심리를 잘 이용했다.
성낙주의 점집을 찾았던 인물 중에는 여관을 운영하며 부동산 몇 채를 가진 미망인 전씨가 있었다.
요통이 있는 전씨에게 굿을 해야 한다며 접근해 몸에 침이나 뜸을 해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성낙주.
그런 성낙주에게 끌렸던 전씨는 여관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주 여관으로 불렀고 2월부터는 동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동거는 모든 이에게 불행으로 다가왔다.
항상 전씨와 성낙주는 싸움을 벌였다.
후에 성낙주는 자신이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치며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해 밤일문제로 다툼이 잦았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
전씨에게는 중학교3학년 딸 이양이 있었는데 친했던 모녀으 사이는 엄마가 성낙주를 여관으로 들이면서 멀어졌고 이런 불만도 전씨와 성낙주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로 1년6개월은 지속됐다.
1994년8월13일
평소와 같이 말다툼이 시작됐고 유독 싸움이 길어지자 전씨의 딸 이양은 참다못해 성낙주에게
"아저씨, 매울 싸우시는데 이제 좀 집에서 나가주세요."라며 말을 했다.
이양의 말을 들은 성낙주는 분노했으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분노를 바로 표출하진 않았다.
7시간 뒤인 8월14일 새벽 5시
전씨의 여관으로부터 500m떨어진 집에서 홀로 자고 있던 이양에게 향했던 성낙주.
자신의 집에서 곤히 자고 있는 이양을 발견한 성낙주는 이양을 교살했다.
준비한 흉기를 사용해 시체를 훼손하고 살점은 정화조에, 남은 부위는 검은 봉지에 싸 라면박스2개에 담아 밀봉했다.
그날 오후 1시
성낙주는 이복동생에게 돼지머리를 처리해야 한다며 도와달라 부탁했다.
그가 점집을 운영했기에 고사를 지냈으리라 생각한 이복동생은 차를 몰아 성낙주가 지시한 장소로 온 그가 본 것은 라면박스2개.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한 휴게소에 차를 세운 그들은 인근야산을 올라 땅을 파고 라면박스를 묻었다.
여관을 보고 있던 전씨는 딸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인데도 여관에 들르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집으로 향했다. 딸의 방에 ㄴ호여있는 한장의편지를 발견한 전씨.
중학교3학년이 사랑의도피를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불과 어제만해도 성낙주에 대해 안좋은 감정을 표현한 딸이 이런 편진를 남기는 것은 더 이상했다. 게다가 자필이 아닌 타자로 쓴 편지
당황했던 전씨는 사춘기인 딸이 어제의 일 때문에 가출했다 판단했고 경찰에 가출신고를 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어울리며 성적도 우수했던 이양이 가출했다는 것은 경찰이 보기에도 이상했을 것. 그들은 가출보다 실종에 중심을 두고 수사를 벌였다.
이양의 시신을 유기하고 여관으로 돌아온 성낙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1994년8월21일새벽3시
전씨는 성낙주와 말다툼을 벌였고 화가 난 성낙주는 아침8시에 전씨를 살해했다.
라면박스 3개에 전씨의 유해를 나눠 담은 그는 다음날 22일아침9시에 이복형에게 차가필요하다며 전화했다.
오전 11시 렌터카를 가져온 이복형은 성낙주의 지시에 따라 강원도 원주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포크레인을 사용해 땅을 파 라면박스를 묻었다.
모녀를 살해하고 유기한 성낙주는 전씨의 여관에서 주인행세를 하고있었다.
전씨의 지인은 그런 성낙주를 의심하며 전씨의 행방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출한 딸을 위해 불공드리러 갔다는 말뿐.
지인은 성낙주를 의심하며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 역시 모녀의 실종에 성낙주가 관여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며 1994년8월22일에 임의동행으로 경찰서로 불렀다.
성낙주는 모녀의 행방에 모르쇠로 일관하며 침묵했고 지속해서 염불을 외며 심문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수상한 점 두가지를 발견한다.
1. 이양이 실종 당시 남겨둔 편지에 적힌 "엽"이라는 글자.
옆집, 옆에 등 옆을 써야 하는 단어에 엽집 엽에 라며 엽으로 적혀있던 이양의 편지.
당시 공부를 잘했던 이양이 이런 실수를 할리 없었다.
2. 손편지가 아니라 타자로 친 편지였기에 누군가 이양인척 편지를 남겼다 생각한 경찰은 성낙주에게 진술서를 쓰라 말했다.
앞선 사실을 밝히지 않고 옆이 들어간 단어를 유도해 진술서를 쓰게 했던 경찰.
그들의 생각처럼 성낙주는 옆을 엽으로 쓰고 있었다.
두번째는 그의 소지품에서 발겨노딘 고속도로 휴게소 영수증.
전씨가 실종된 21일 성낙주는 자신이 경동시장에서 장을 봤다 주장했으나 휴게소 영수증이 발견되면서 24일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재판부는 성낙주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형을 집행당하지 않고 복역 중이더 그는 친부모를 찾아온 애런에게 자신이 친아버지라 주장하기도 했지만 친자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유전자검사결과 때문에 모두 감형을 위한 쇼였다는 것이 밝혀지며 더 큰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을 다룬 김영철, 다니에 헤니주연의 "마이파더"라는 영화가 2007년에 개봉하기도 했다.
'사건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왕립 외과 대학 19세기 해부된 그가 아직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유 (0) | 2022.04.07 |
---|---|
미국 일리노이주 힐스버러 평범했던 남성 그의 형량은 100~200년 (0) | 2022.04.07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사건 4번째 결혼에 성공한 백만장자의죽음 (0) | 2022.04.06 |
미국판 악마를 보았다. 오클라호마 걸스카우트 살인사건 (0) | 2022.04.06 |
지적장애 피고인의 사형집행은 위헌? (0) | 2022.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