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해부된 그가 아직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유.
돈과 명성을 위해 그들이 벌인 일
19세기 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는 알렉산더 몬로, 존 벨, 존 굿서, 로버트녹스 등 선구적인 해부학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의 인체에 대한 연구는 의학을 비롯해 여러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에든버러는 해부학 연구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됐다.
당시 스코틀랜드 법률에선 해부에 필요한 시체는 감옥에서 죽은사람, 스스로 생 마감한 사람, 사망한 고아 같은 경우에만 허용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해부학의 인기가 늘어남에 따라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지다 보니 실습을 위해 필요한 시체의 수는 항상 부족한 상황이라 몇몇 해부학자들은 지속적인 연구를 해야한다는 명목하에 불법거래를 통해 시체를 구했다.
불법적으로 시체를 구하는 방법 중 하나는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었는데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덤을 어지럽히는 것은 고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에 범죄행위지만 시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기에 위법 행위로 볼 수 없었던 것.
결국 유가족들은 이러한 나쁜 사람들을 막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야 했고 무덤을 감시하는 경비원을고용하는 등 여러 대응책을 내놨다. 시체를 훔치다 유가족들에게 걸려 사망하는 일도 발생하자 점차 이런짓을 하는 사람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체를 불법거래했던 해부학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
로버트 녹스는 그런 해부학자 중 한명이었다.
1814년 의사면허를 획득했던 해부학자 녹스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여러전쟁에 참여했던 인물.
1825년 에든버러 왕립 외과 대학의 교수가 됐고 해부학을 강의했다.
"신선한 해부학적 주제에 대한 전면적인 시연"=시체를 가지고 직접 해부학을 시연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많은 인기를 얻었던 녹스.
하루에 2번 열리는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학생이 모였고 그 수는 매번 4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체의 공급이 갈수록 줄어들어 녹스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녹스에게 접근한 버크와헤어.
아일랜드 출신인 버크는 1818년에 스코틀랜드로 이주해온 노동자였고 두번재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살았던 인물.
헤어는 과거가 불분명한 남성이었고 하숙집을 운영하며 거칠고 남들에게 잘 시비를 걸었던 인물.
그들은 1827년에 만나 친구가 되었다.
버크는 아내와 함게 헤어의 하숙집으로 이사했고 그들은 항상 떠들썩하게 놀았다.
1827년11월29일
헤어는 하숙인 중 한명인 A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숙비가 4파운드나 밀려 받아낼 생각이었다.(당시 1파운드 =금7g)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헤어는 열쇠를 사용해 강제로 문을 열었고 침대에 사망해 있는 A를 발견했다.
A가 죽었다는 것보다 받지 못한 돈을 먼저 걱정했던 헤어.
로비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버크에게 헤어가 현 상황을 이야기하자 버크는 그에게 돈을 받을 방법이 있다는 말을 건넸고 헤어는 좋은방법이라며 곧바로 의사와 경찰을 불렀다.
도착한 의사가 부종으로 인해 A가 사망했다 진단하자 경찰들은 무고자인 A에 대해 어찌 처리할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헤어는 경찰에게 자신이 장례를 치러주겠다 말했고 목수를 불러 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제작해 A를 넣고 밀봉했다.
지역교회에서 내일 장례를 치르겠다는 헤어의 말을 믿고 경찰은 돌아갔고 모두가 돌아간 것을 확인한 헤어와버크는 관을 열기 시작했다.
침대 밑에 A의 시체를 숨긴뒤 관 안에 무거운 것들으 채워 다시 밀봉했던 그들.
다음날 예정대로 장례식이 치러줬고 버크와 헤어는 몰래 빼돌린 시체를 들고 에든버러 왕립 외과 대학으로 향했다.
그들은 녹스에게 A의 시체를 7파운드10실링을 받고 팔았다.
그들이 녹스의 연구실을 나설때 그들을 기다리던 조수가 "처리해줄 사람이 또 생겼을 때 다시 볼수있다면 기쁘겠네요."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는 녹스도 A의시체가 불법거래라는것을 알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조달을 해주길 바란다는 것을 조수를 통해 전달한것이었다.
헤어와버크는 전문시체도굴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시체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라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하숙인들을 목표로 삼았고 그렇게 1828년10월까지 총 16명이 사망한 뒤 녹스의 실험실로 옮겨졌다.
마지막 희생자인 마거릿은 아일랜드 출신의 중년여성이었다.
1828년 10월
외지에서 방문해 숙박장소를 구하던 마거릿을 발견한 버크는 동향이라 말하며 헤어의 하숙집으로 안내했다.
고향이야기를 하며 저녁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결국 마거릿은 술에취해 잠이들었다.
그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았던 하숙인들에게 오랜만에 친척이 찾아와 한잔한것이라며 둘러댔던 버크
하숙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갔을 무렵 버크와헤어는 마거릿을 살해하고 침대끝에 있는 짚더미에 숨겼다.
다음날 하숙인 중 한명이 마거릿이 숨겨져 있는 침대쪽에서 스타킹을 발견해 다가가려고 하자 버크는 놀라며 저지했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버크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침대를 확인했고 사망해있는 마거릿을 발견해 경찰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지만 그가 경찰을 대동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신이 사라진 상태였다.
경찰은 하숙인의 증언을 토대로 버크와 헤어를 심문했고 그들이 최근 녹스의 실험실을 자주 오갔던 정황을 포착했다.
다음 날 경찰은 녹스의 실험실에서 마거릿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버크와헤어는 자신들이 그저 사망한마거릿을 녹스에게 돈을 받고 넘겼다고 주장해 경찰은 난관에 빠졌다.
마거릿을 검시한 검시관은 그녀가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라 결론내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버크와헤어를 살인죄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과거 헤어의 하숙집에서 많은 이들이 사라진점을 들어 경찰은 지속적으로 헤어를 심문하며 회유했다.
결국 기소면책특권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버크와 저질렀던 모든범죄를 자백했다.
1828년12월24일
재판에서 헤어는 약속대로 기소면책특권으로 제외되었지만 버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전 스코틀랜드 법무부 장관 데이비드는 버크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29년1월28일
버크는 군중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2월1일 한 대학교 해부학수업에서 공개해부되었다.
헤어는 2월 5일 석방되어 화난 군중들을 피해 스코틀랜드를 벗어났다.
모든것이 마무리된 듯 했지만 죗값을 받지 않은 사람 바로 불법으로 시체를 사들인 녹스.
당시 경찰은 녹스가 그들과 했던 거래에 대해 공개적인 성명을 거부해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군중들은 그가 아무것도 몰랐을 리 없다며 비난했고 녹스의 집에 몰려가시위를 벌였다.
결국 왕립 외과 대학의 규정위반행위로 강의에서 제명됐지만 여전히 실력있는 해부학자여서 1862년 사망전까지 의료행위를 계속했다고 한다.
침대 옆에 위스키 한병과 밤새 지속될 수 있는 촛불없이는 잠을 잘수없다 말하며 죄책감을 표현했던 버크. 그의 유골은 지금 에든버러 의과대학해부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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